스물한 살 애송이가 골프 황제가 되기까지, 8개 홀이면 충분했다.
초록이 만발한 오거스타는 고요했다. 만 스물한 살 4개월을 갓 넘긴 흑인 골퍼의 티샷. 갤러리도 숨을 죽였다. 호쾌한 타구음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간 공은 살짝 방향을 틀었다. 페어웨이를 벗어나 솔잎이 촘촘히 쌓인 소나무숲에 떨어졌다. 그리고 파 퍼트 실패.
1997년 4월 10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타이거 우즈는 첫 홀을 보기로 마쳤다. 불과 6년 전까지 흑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오거스타의 거센 자존심은 ‘골프 천재’의 도전 역시 거부하는 듯했다.
우즈는 흔들렸다. 4번과 8번, 그리고 9번 홀까지 연달아 보기를 범했다. 전미 아마추어 골프선수권을 세 번이나 제패한 우즈였지만, 말 그대로 우즈의 플레이는 아마추어의 수준이었다. 전반 9홀에서 4오버파 40타. “우즈의 일천한 경험이 경기력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콜린 몽고메리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됐다. “골프 역사의 그 어느 선수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것”이라던 아버지 얼 우즈의 호언장담은 웃음거리가 됐다.
10번 홀 티박스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우즈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과도 같은 한숨이었다. 그 순간,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듯 우즈는 극적인 반전을 이뤄나가기 시작했다.
백스윙을 줄인 우즈는 2번 아이언을 집어 들고 티샷을 했다. 공식 대회 도중에, 그것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다는 마스터스 첫날, 이제 갓 스물한 살이 된 선수가 마인드 컨트롤 만으로 스윙의 잘못된 점을 고쳐나갔다. 양탄자 같은 페어웨이에 떨어진 볼을 가볍게 그린에 올렸다. 5m가 조금 넘는 버디 퍼트를 홀컵에 떨어뜨리며 첫 버디를 기록했다.
이후 우즈는 거침이 없었다. 파3 12번 홀에서는 그린에 미치지 못한 볼을 가볍게 칩인 버디로 연결했다. 13번 홀에서도 연달아 버디를 잡아낸 우즈. 하이라이트는 15번 홀이었다. 500야드에 이르는 파5 15번 홀에서 우즈는 웨지로 투온에 성공했다. 파워 넘치는 흑인 골퍼가 뿜어내는 신기의 장타에 갤러리는 환호했다. 1m 이글 퍼트가 홀컵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즈의 스코어는 단숨에 언더파로 접어들었다.
17번 홀에서도 다시 버디를 잡아낸 우즈는 8개 홀에서 6타를 줄이는 기염을 토했다.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골프 황제로 변모하는데 딱 8개 홀, 2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1997년 마스터스 첫날 출전 선수 전체의 평균 타수는 76.09타였다. 61년 마스터스 역사상 다섯 번째로 높은 첫날 평균 타수였다. 극도로 까다로운 핀 위치와 상상 이상의 그린 스피드에 선수들은 너도나도 불만을 털어놨다. 우즈 역시 1라운드를 마친 뒤 “핀을 공략하기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도 우즈는 첫날 경기를 2언더파 단독 4위로 마쳤다. 그의 앞에 존 휴스턴과 폴 스탠코스키, 폴 에이징어가 있었지만, 모두가 이번 마스터스의 주인은 우즈가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토록 압도적인 라운드, 내가 ‘골프황제’다.
마스터스 우승자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11~13번 홀, 이른바 아멘코너. 2라운드 경기에 나선 우즈는 11번, 12번 홀을 침착하게 파로 마쳤다. 그리고 파5 13번 홀, 8번 아이언으로 친 두 번째 샷은 핀 6m 지점에 정확히 안착했다. 절로 ‘아멘’을 외치게 된다는 승부처의 마지막 홀에서 오히려 손쉽게 이글을 잡아내며 함께 경기를 펼친 폴 에이징어를 실소케 했다.
그리고 이어진 두 홀 연속 버디. 13, 14, 15번 세 홀에서 간단히 4타를 줄인 우즈는 3타 차 선두로 나서며 2라운드를 마무리했다. 온전히 우즈를 위한 무대였다. 오거스타의 강렬한 햇살만큼 우즈의 샷 하나하나는 압도적이었다. 차원이 다른 샷과 코스 공략으로 우즈는 경쟁자들을 압도해나갔다.
3라운드 우즈의 파트너는 콜린 몽고메리였다. 대회에 앞서 우즈의 경험 부족을 단점으로 지적했던 스코틀랜드의 백전노장이었다. 우즈는 더욱 열의에 불탔다. 몽고메리를, 그리고 오거스타를 완전히 제압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우즈는 몽고메리가 보는 앞에서 평균 323야드에 이르는 압도적인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파워 넘치는 티샷과 정확한 아이언샷, 신기의 퍼트까지, 우즈는 단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3라운드 하루에 보기 없이 버디만 7개나 잡아내는 완벽한 플레이를 펼쳤다. 우즈는 65타, 몽고메리는 74타를 기록했다. 경기를 마친 뒤 몽고메리는 “그는 패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프로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일반 골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3라운드가 끝났을 때, 우즈와 2위 콘스탄티노 로카의 차이는 무려 9타였다. 15언더파 201타로 1976년 레이 플로이드가 기록한 54홀 최소타 기록과 타이였다. 이미 우승자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1997년 4월 13일 마스터스 최종 라운드는 우즈의 대관식이나 다름없었다. 갤러리들은 황제의 거침없는 행진을 경의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미국 내에서만 4,400만 명의 시청자가 우즈의 한 샷 한 샷을 TV로 지켜봤다. 2, 3라운드의 압도적인 모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우즈는 3타를 더 줄이며 찬란한 우승을 마무리 지었다.
2위 톰 카이트를 12타 차로 따돌린 완벽한 승리였다. 잭 니클라우스의 최다 타수 차 우승 기록을 다시 썼다. 역시 잭 니클라우스와 레이 플로이드가 갖고 있던 최소타 우승 기록마저 갈아치웠다. 전 세계 골프계를 경악케 하며 마스터스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그린재킷을 입은 주인공이 됐다.
악명 높던 오거스타의 코스 세팅은 우즈 앞에서 초라해졌다. 새 골프 황제에게 오거스타 내셔널은 그저 파5 롱홀에서 웨지로 투온이 가능한 쉬운 골프장이었다. 오거스타가 자랑하는 유리알 그린에 적응하기 위해 농구코트 위에서 퍼트 연습을 했다는 우즈는 결국 나흘 내내 한 번도 3퍼팅을 하지 않았다.
“골퍼는 백인이며, 캐디는 흑인이 될 것”이라고 했던 클리포드 로버츠가 창립한 오거스타 내셔널에서, 우즈는 모든 백인 선수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오거스타 캐디 출신인 리 엘더가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오거스타에서 라운딩을 한 1975년에 우즈는 태어났고, 그로부터 21년이 지나 우즈는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마스터스를 제패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시상식에서 전 대회 우승자 닉 팔도가 우즈에게 그린재킷을 건네는 장면을 바라보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는 “초록과 검정이 참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라며 미소 지었다.
4번의 마스터스 우승, 5번째 우승은 가능할까?
1997년 마스터스는 ‘골프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대관식 무대였다. 그리고 우즈는 최전성기를 달리던 2000년대 초반, 2001년과 2002년, 2005년까지 총 4번의 마스터스 우승을 완성했다.
2005년 마스터스 마지막 날에는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베스트 샷을 선보였다. 치열한 우승 경쟁을 이어가던 우즈는 오거스타 16번 홀에서 티샷을 깊은 러프에 빠뜨렸다. 파 세이브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린의 경사를 한참 동안 살피던 우즈는 공격적인 칩샷을 했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던 볼이 그린 에지에 떨어진 뒤 갑자기 90도로 방향을 틀었다. 점점 홀과의 거리를 좁히던 볼이 홀 앞에서 1.5초 동안 멈춰선 뒤 기적처럼 홀컵으로 빨려 들어갔다.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로 기세를 올린 우즈는 결국 승부를 연장으로 이끌었고, 생애 네 번째 그린재킷의 주인이 됐다.
우즈의 칩샷이 홀 앞에서 멈춘 1.5초 동안, 볼에 새겨져 있던 나이키 로고는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수백억 원의 광고 효과를 누리며 골프 관련 산업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우즈는 마스터스를 통해 ‘골프 황제’가 됐고, 골프 역사를 바꿨다. 골프계의 인종 차벽을 허물었고 제한적이던 골프 팬의 범위를 확대했다. 골프라는 스포츠 종목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부정할 수 없다.
올해 마스터스에서 우즈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더 아쉽다. 마흔 살이 넘어 허리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고 1년 5개월 동안 필드를 떠났던 빈자리는 단시간 내에 메우기엔 너무 커 보인다. 복귀를 위해 나섰던 올해 두 번의 대회에서는 처참한 모습만 보인 채 예선 탈락하거나 기권했다.
우즈의 재기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더 이상의 우승보다는, 은퇴 시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고 있다. 1997년 마스터스에서 골프 황제로 등극한 지 정확히 20년 만인 올해 마스터스를 기점으로, 우즈는 은퇴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골프 황제의 최근 5년은 성추문과 부상으로 점철된 치욕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골프 팬들은 우즈가 마스터스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고 명예를 되찾길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우즈 없는 오거스타도, 마스터스 없는 우즈도, 우리에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