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뚝이' 정재은(27, BC카드)은 최근 본인으로선 달갑지 않은 이유로 뉴스에 이름을 올렸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여자골프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이자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의 인기 스타인 그 자신이 지난달 열린 시드전에서 최종합계 12오버파로 82위에 그쳐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곧이어 일본 지바현에서 열린 일본 QT(퀄리파잉 토너먼트) 최종전에서는 12위의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정재은은 내년 시즌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서만 뛰게 됐다.
정재은은 지난해와 올해 한국과 일본 투어를 병행했다. 올해는 유독 한국 투어에서의 성적이 부진했다. 결국 KLPGA투어 상금랭킹 77위에 머물며 시드전에 나가야 했고, 동시에 일본 QT도 치러야 했다.
올 시즌 누구보다 사연이 많았던 정재은을 지난 15일 만났다. 그는 "매번 인터뷰 때마다 '안 풀리지만 이제는 우승한다'는 식의 레퍼토리로 내 이야기가 나가는 게 참 싫었다"고 했다. 웃을 때마다 볼에 깊게 볼우물이 패이는 매력적인 미소를 가졌지만, 골프를 하는 이유와 재미가 무엇인지 묻자 의외로 "오기와 승부욕 때문에 한다"는 '독한'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 골프에서는 늘 최고의 자리에 있는 스타들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하지만 정재은처럼 치열하게 시드를 얻기 위해 싸우는 선수가 현재 대다수의 골프 선수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진짜 여자 골프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정재은은 팬들이 한 번은 곱씹어 볼 만한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지난 달 전남 무안에서 열린 시드전에 나갔다. 어땠나.
"2013년에 성적이 부진했다. 2007시즌부터 쭉 투어생활 하다가 그때 처음으로 시드전에 갔다. 당시에는 분위기 적응도 안 되고, 압박감도 너무 컸다. 이번에는 '처음도 아니고 뭐' 이러면서 긴장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실전에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드전 분위기는 유독 살벌한 걸로 유명하던데.
"100명 넘는 많은 인원이 샷건(1~18번 홀에서 동시에 티오프하는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는데, 그게 7시간 정도 이어진다. 정신이 없다. 게다가 무안CC는 나무도 없고 허허벌판이다. 한 마디로 그 느낌을 표현하면, 그냥 '잿빛'이다. 음산하고, 선수들도 다들 너무 예민하고. 정말 삭막하다. 뭐랄까, 멘탈이 한 번 나가면 되돌리기 쉽지 않은 게 시드전이다. 그래서 실수 한 번 하면 그대로 끝인 경우가 많으니까 선수들의 부담이 더 크다."
올해 한국과 일본투어를 병행하면서 힘든 점도 있었을 것 같다.
"올해가 병행 2년째였다. 작년에 시작하면서 '양쪽 다 시드를 잃으면 할 수 없지' 라고 생각하고 부담 없이 했다. 그런데 조금만 잘 맞으면 '여기서 잘 해서 상금 많이 모아 놔야지'라는 부담이 점점 더 커지더라. 올해는 초반에 감이 좀 안 좋았는데,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을 병행하면 바쁘게 이동하느라 연습 시간도 적어지고, 뭔가 샷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도 그 문제를 잘 고치지 못한 채 시합을 하게 된다."
올 초 미국 전지훈련에서의 정재은. 마니아리포트 자료사진.
체력이 가장 큰 문제였나.
"체력 때문에 잘 안 된 거라고 딱 하나를 잡아서 말할 수는 없다. 중간에 쓰러졌다 거나 힘이 없어서 대회에 못 나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돌아 보면, 그게 그저 정신력으로 버틴 것 같다. 올해 KLPGA투어를 미리 접고 2주 정도 여유를 갖고 시드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때 덜컥 병이 나더라. 결국 1주일은 누워서 보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시드전이 힘들었던 건 아닌가.
"그런 핑계를 대고 싶진 않다. 또 그게 원인도 아니었다. 한국 시드전 할 때, 연습 때도 샷이 잘 맞았고 티오프 하기 전 오전에도 늘 감이 좋았다. 그런데 막상 실전 들어가면 무너졌다. 시드전 셋째 날 80개를 쳤다(시드전은 4라운드로 진행).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나왔다. 한국에서 시드전 떨어지고, 하루 쉬고 일본 최종 QT에 나갔는데 성적이 좋은 거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일본 QT 때는 부담이 적었던 건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까지 떨어지면 진짜 끝이구나'라는 생각에 긴장은 더 했던 것 같다. 일본 QT 최종전을 12위로 끝냈는데, 마지막 날 결과를 받고 나니까 오히려 화가 났다. 대체 한국 시드전 때는 왜 그렇게 안 됐던 건지 모르겠더라."
당시 시드전 관련 뉴스 보도에서는 정재은 프로가 '탈락자 대표'처럼 보도됐다. '누구는 합격, 정재은 눈물', 이런 식으로.
"아, 정말 속상했다. 나만 떨어진 것도 아닌데 왜 나만 콕 찍어서 기사를 쓸까. 그런데 더 생각해 보면, 그래도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내 이름을 써 주시는 것 아닌가 감사하게 생각하자 라고 마음을 바꿨다."
정재은 프로의 기사에는 '무관', '유망주 출신이지만 아직 우승이 없는 선수' 이런 식의 스토리가 꼭 나오곤 한다.
"그런 똑 같은 레퍼토리가 매번 내 이름 앞에 붙는 것 때문에 힘들었다. '올해는 꼭 우승 할 거예요', '우승은 없지만 만족해요', 같은 식의 제목이 붙는 게 참 싫었다. 매번 우승하는 선수조차도 대체 누가 만족을 하겠나(웃음). 우승이 없다는 게 점점 더 부담도 됐다. 꾸준히 1부 투어에 머무는 것도 실력인데, 너무 우승, 우승 하면서 압박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 일본 같은 경우는 한국보다도 규정이 더 까다로워서 1부 투어 시드 유지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
골프를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진지하게 몇 번 했다고 들었다.
정재은 자료사진.
"이게 내 길이 아닌데, 내가 괜히 붙잡고 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들러리 서는 느낌도 참 싫었고. 50등 안에 꾸준히 들어가는 것도 잘 하는 건데. 나를 비롯해 주변이 모두 만족을 하지 못하는 것 같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골프라는 게, 타이거 우즈도 우승한 다음 대회에서 컷 탈락할 수 있는 종목이라던데. 안 풀릴 때는 급격히 떨어지기도 하고.
"맞다. 특히 골프 선수는 톱클래스에 있는 선수라 할지라도 자신감의 기복이 엄청 심할 것이다. 공 잘 맞을 때는 너무 재미있고 신나지만, 조금만 안 풀려도 내가 세상 바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근에 김하늘 언니랑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잘 하는 하늘 언니 조차도 '그만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는 말을 하더라."
한국 여자골프에 잘 하는 선수들이 워낙 많으니까 보는 사람들의 기대감이나 눈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게 아닐까.
"막상 프로골프 관계자들, 그러니까 선수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은 꾸준히 상위권에 들어가고, 시드를 유지하고, 그 정도의 일도 정말 대단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골프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뭐 박인비 정도는 해야 골프 잘 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하신다.(웃음)"
내년엔 처음으로 일본투어에서만 뛰게 된다. 어떻게 준비할 생각인지.
"스케줄 조절을 잘 해야 될 것 같다. 일본은 매주 시합이 있기 때문에, 몇 주 정도 대회에 나가고 언제 쉴 것인지 미리 계획을 잘 세워야 된다. 올 겨울에는 처음으로 해외에 장기 전지훈련도 안 가려고 한다. 겨울에 2주 정도 동남아에서 잠깐 훈련하고, 한국에서 주로 훈련하다가 2월쯤 일본으로 가서 개막전 준비할 생각이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시즌 초반 남쪽에서 시작해서 점점 대회 개최지가 올라가면서 대회가 열린다. 한 군데 근거지를두고 거기를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는 스케줄이 아니다. 선수들이 매너가 아주 좋지만, 또 보이지 않는 경쟁은 더 치열하다. 올해 풀시즌을 앞두고 가장 걱정되는 건 정신적인 부분이다. 일본은 숙소도 공간이 좁고, 골프 대회는 대부분 시골에서 열리기 때문에 저녁에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는데 성적까지 잘 안 나오면 정신적으로 정말 외롭고 힘들더라. 그런 부분을 잘 극복하는 게 과제다."
혹시 내년에 한국 시드전에 다시 뛸 생각이 있는지.
"무안에 또 가라구요?(웃음) 그런데 아직까지도 올해 시드전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잠이 안 올 정도다. KLPGA투어에서 내가 좋아하는 코스들, 대회들 생각도 날 것 같고. 일단은 일본투어에 전념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 물론, 우승은 하면 좋다. 그게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그 생각만 하진 않으려고 한다. 일단 1부 시드를 계속 이어가는 게 목표다. 이제는 골프를 치는 재미 보다도 오기, 승부욕 이런 것 때문에 골프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